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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세상이야기

미국서 비로써 한국 사람이 된 신호범 상원의원

 

6.25전쟁이 많은 사람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국군 포로로 최빈국 북한에서 60년의 세월을 지내다 탈북해 가까스로 고향땅을 밟은 80대 노인이 있는가 하면, 6.25 전쟁에 참여한 미군 장교의 양아들로 미국에 건너가 5선의 상원의원이 되어 당당히 대전을 찾아 강단에 선 신호범의원도 있다.
 

 “고향이 그리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꿈속에서나 생시나 흐느껴 울며 한 많은 세월을 살았다”는 국군포로 할어버지의 인생이나 황색인종에 서러움을 겪어가며 고국에 대한 애정을 키워온 신호범의원은 살아온 환경은 다르지만 그 마음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기서 신호범의원의 인생사에 대해 강연 내용을 토대로 요약해 봤다. 우선, 유년시절로 태엽을 되돌려보면,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마저 행방불명인 상태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고아나 다름없는 신호범은 서울 거리에서 지나가는 미군에게 "give me chocolate"를 외치다 미군 병사의 도움으로 미군부대에서 일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낯설고 힘든 상황에서 어머니가 그리워 흐느껴 울고 있는데 자기에게 관심을 보인 폴이라는 미군장교에 입양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16세에 입양, 18세에 부산항에서 미국으로 떠난다.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는 그때 멀어져 가는 고국을 보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침을 뱉었단다. 그러나 꿈의 나라 미국 또한, 만만치 않은 나라였다. 우선 영어에 약한 폴신은 치과의사인 아버지의 도움으로 1년3개월 만에 미국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대학에 입학한다.


 1958년 23세 때, 미군에서 근무할 시절 백인 군인 몇몇과 함께 유색인종 금지 식당에 들어갔다가 지배인으로부터 갖은 욕설과 함께 질질 끌려 나온 사건이 있었고 그 사건 후 그는  불합리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정치인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워싱턴대 교수를 거쳐 30여년이 흐른 1991년 워싱턴주 하원의원 선거에 뛰어들어 하루 13시간씩 유권자를 찾아 걸어 다닌 끝에 당선된다.


유권자 28만명 중 백인이 96%이고 유색인종이 4%밖에 안 되는 힘든 싸움에서 그의 열정이 백인들의 마음을 연 것이다. 선거에 당선되었어도 그의 겸손과 예는 미국인들을 감동시켰다. 의원으로 당선된 다음날 아침, 비가 내리는 거리에 서서 “thank you"라 쓴 프랜카드를 들고 일일이 당선 인사를 하는 폴신을 보고 미국인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고 일주일전에 끝난 상원의원까지 5선을 가볍게 넘을 수 있었다.


 그는 말한다. 무슨 일이든지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특히, 한국인들은 열심히 해야 한다. 그는 또 21세기는 한민족이 큰일을 할 것이라 내다보면서 자기 자신은 앞으로 한미관계 협조에 중점을 두면서 정치인 후학양성에 힘쓸 것이라 한다.


 실제 이번 하원 및 상원의원 선거에 출마한 한국인은 총 11명 중 9명이 당선되었는데 미시건주에서 34세의 정치신인이 상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19세 때 침을 뱉고 한국을 떠났지만 미국에서 한국의 뿌리를 찾았고 미국에 가서 비로써 한국 사람이 되었다고 말하며 강의를 맺었다.